같은 공장 같은 라인에서 한 날 한 시에 제조된 자동차는 정말 똑같다고 볼 수 있을까?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로 만든 요리는 과연 똑같을까? 주관적 차이를 제외하더라도 완벽하게 똑같은 둘을 찾아보기란 의외로 어렵다. 심지어 유전자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를 보아도 성격이든 외모든 둘이 똑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아니 엄밀하게 말해 과학에 기반한 기술의 발전이 대량생산과 소비의 물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면서 우리가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믿음의 하나는 절대적이고 결정론적인 지식이다. 오늘날 공학적으로 구현된 과학의 원리는 인간의 능력 밖이라고 치부하던 일들을 그것도 ‘기적’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재현가능한 방식으로 이뤄냄으로써 과학을 종교적 신념이나 전통적 가치에 상응하는 교리(dogma)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입력값’이 주어지면 ‘출력값’이 일의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곧 과학이라는 믿음에 따르면 모호함이나 불확실성은 과학의 속성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비가 내릴지 안 내릴지를 ‘속 시원히’ 말해주던 종전의 일기예보가 확률적 예측으로 바뀌었을 때의 불편함과 혼란(“강우확률이 60퍼센트라면 우산을 준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리고 종종 일기예보가 빗나갔을 때 터져나오는 해당관청에 대한 비난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과학이 응당 확실하고 결정론적인 지식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결부된다.
입력값이 똑같아도 출력값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역시 과학적 연구의 산물이다. 일기예보처럼 입력값 자체가 극도로 복잡하고 불충분한 정보에 의존하는 경우엔 정보의 확충(더 많은 인공위성, 더 촘촘한 측정시설)이나 계산능력의 향상(더 효율적인 슈퍼컴퓨팅 자원 확보)이 예보의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줄여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이야말로 자연에 내재된 속성이라는 사실이다.
똑같은 유전자를 지닌 일란성 쌍둥이가 다른 모습,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은 우선 환경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체세포를 복제해 똑같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을 만든다 해도 한 세기 전 위인의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하고부터 겪어온 생물학적, 사회적, 정서적 환경을 정확히 재현하지 못하는 한 아인슈타인의 환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줄기세포가 분화하여 신경세포가 되고 간세포, 혈액세포가 되는 일련의 과정은 동일한 유전적 정보에서 출발하더라도 생리학적 환경에 따라 얼마나 ‘출력값’이 다양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극명한 예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유전자에 적혀 있는 유전정보와 겪어온 환경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어떤 유전자가 어떤 단백질을 얼마나 많이 만들고 세포 내의 어떤 생화학반응을 더 일으킬지는 순전히 확률적 과정을 따른다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 나갔을 때 운이 좋으면 금방 버스를 탈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몇십 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포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확률의 지배를 받는다. 특히 그 버스가 마침 나를 공항으로 데려다 줄 중요한 연결편이었는데 놓치게 된다면 결국 이어지는 항공편까지도 취소하거나 연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을지 모른다.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숫자의 단백질이 유전자를 켜고 끌 수 있는 세포 수준에서는 이것이 질병이나 사멸과 같은 중대상황이 될 수도 있다.
사실 확률적 요동의 문제는 반도체를 기반으로 하는 미래의 전자공학이 극복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미 30나노미터(머리카락 굵기의 2000분의 1정도)의 선폭을 가진 메모리반도체가 양산되고 있지만 기술적 혁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좁아질 대로 좁아진 전자회로의 선폭을 흐르는 전류의 확률적 요동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소위 패러다임의 문제이고 근본적인 물리법칙의 문제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공학적 시스템에서 이제야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문제들이 분자생물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던 셈이다. [2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