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리노이 대학의 심리학자들이 지능, 성적, 신체조건 등이 고르게 분포된 두 학생집단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다. 연구자들은 철자의 순서를 바꾸어 다른 단어나 문장을 만들어내는 어휘퀴즈(이를테면 ‘rat’으로부터 ‘art’, ‘George Bush’로부터 ‘He bugs Gore’ 따위를 유추하는 일)를 준비했다. 그리고 1분 동안 한 집단에게는 ‘문제를 풀 것인가(Will I?)’ 생각해 보게 했고, 다른 집단에게는 ‘곧 문제를 풀게 될 것이다(I Will)’라고 생각하게 했다. 이후 10분 동안 두 집단의 학생들은 같은 문제지를 풀었다. 그 결과 흥미롭게도 이른바 ‘Will I?’ 집단이 ‘I Will’ 집단보다 월등히 많은 문제를 푼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실험뿐 아니라 최근의 관련연구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결론은 결국 창의성을 고취하고 발휘하는 일에 관한 한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창의성이 우선적 덕목으로 요구되는 일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내적 동기를 부여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보상이나 벌칙 같은 외적 동기를 적절히 활용하는 일은 전통적 경영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에서는 당근이나 채찍 같은 외적 동기가 결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처벌이나 비난 같은 채찍이 창의성의 계발과 발현에 독이 된다는 소리는 당연하게 들린다. 하지만 인센티브나 인사상의 이익 같은 ‘당근’도 그와 마찬가지로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일견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 보인다. 거기에 대해 연구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창의적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스스로 부여한 내적 동기,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몰입과 집중, 그리고 무엇보다 일에 대한 애착이라고. 그런데 보상은, 물론 이 모든 것을 위한 필요조건이긴 하나 자칫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남용되어선 안 된다고.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기꺼이 투자하고 있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적어도 초·중등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는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에 대해 부러운 듯한 어조로 이야기할 때면 딱히 외교적 수사만은 아닌 것 같은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일부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마치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시절의 군비경쟁 같다. 불안에 기반한 무한경쟁.
물론 경쟁력이 이 같은 경쟁을 통해 생겨난다면 지금의 현실을 한탄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이미 잘 정리된 지식을 익혀 나가는 초·중등과정과 달리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식을 찾고 그것을 유익한 일에 적용하는 고등교육 이후의 과정에서 우리는 과연 경쟁력이 있는가? 미국 명문대에 진학한 한국계 학생의 44퍼센트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다면서 저도 모르게 ‘내적 동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궁하면 통한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일맥상통하는 서양의 격언도 있다. 동서양의 선조들이 공히 터득한 삶의 지혜라면 진리에 가까울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논리적으로는 같은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조금 ‘풍부하게’ 해석하자면 동서양의 선조들은 ‘궁해야 통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별 부족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시대에 우리 아이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부모들이 먼저 남부러울 것 없이 풍요롭게 키우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고 가능하면 다소 부족하게, 다소 모라자게 아이들을 기르는거다. 그래야 아이들이 ‘우리 부모만 믿고 있다간 큰코 다친다’며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도모하러 나서지 않을까? 모든 창조의 출발은 바로 ‘결핍’이다. [20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