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럽게 옛날식으로 물질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제주도의 해녀 할머니가 방송에 나왔다. 리포터가 물었다. “할머니, 스쿠바 장비를 사용하면 훨씬 편하잖아요?” “그럼 편하지. 혼자서 백 명 몫은 하지.” “그런데 왜 안 쓰세요?” “내가 그걸 쓰면 나머지 아흔 아홉은 어떻게 살라고?”
심드렁한 할머니의 대답에는 우리가 도덕 시간에 배운 어떤 가르침에도 없던 울림이 있었다. 한편으로 놀라운 속도로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의 일터와 학교에서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의 자세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선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흡사 멸종 직전의 희귀종을 대하는 듯한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된다.
사실 OECD 국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은 ‘모’ 아니면 ‘도’이다. 초고속 무선인터넷 보급률 1위, 청년층 대학교육 이수율 1위, 통신기기 수출 1위, 교육열 압도적 1위. 이뿐이랴. 자살률 부동의 1위, 노인빈곤율 1위, 노인교통사고율 1위, 고등교육비 1위, 농약사용량 1위, 항생제 소비량 1위. 반면 출산율 꼴찌, 저축률 꼴찌, 장애인 예산비중 꼴찌, 사회복지 예산비중 꼴찌, 행복지수, 특히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꼴찌. 치열한 경쟁에 따른 승자와 패자의 삶이 극명하게 갈리는 놀라우리만치 양극화된 사회의 초상들이다.
전쟁 이후 반세기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라는 점에서 첫술에 배부르랴 싶기도 하지만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바닥이라는 사실에 이르면 마음이 무거워 진다. 요즘 학생들은 자조적으로 전교 등수 몇 등 이내는 ‘알짜’, 또 몇 등 이내는 ‘예비’, 그도 못되면 ‘잉여’라고 부른다고 한다. 학창시절의 고달픈 이야기야 군대 이야기처럼 늘 과장되게 마련이라지만 전교 등수로 허용 여부를 가리는 소위 정독실 출입, 등수 순으로 매겨진 신발장, 선택된 일부 학생들의 책상은 더 널찍하고, 컴퓨터도 비치되어 있어 학교에서 인터넷강의까지 들을 수 있다는 일부 학교의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이건 첫술의 문제도 아니고 과장의 문제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 아이가 알짜에 속하든 잉여에 속하든 성적으로 아이들을 분할하고 구획하는 학교는 두 집단의 인간성을 모두 파괴하는 사회이다. 잉여가 된 아이들은 미리부터 사회에 나가 차지하게 될 낮은 지위를 서서히 내면화하고 자신의 포부수준을 낮춘다. 알짜가 된 아이들 역시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느라 동료의 좌절이나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선민으로 커가기 쉽다. 학교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장차 이 아이들이 사회의 주역이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가 될 수 있을지?
지난 21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서울시교육청에 요청해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고교선택제 이후 학교 간 학력차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성적과 경제력에 따른 학교 분류는 하위권 학생이 몰리는 학교나 상위권 학생이 몰리는 학교 둘 다를 비교육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문제는 효율과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해 도입한 경쟁이 정작 효율과 수월성을 높이지도 못하면서 공동체의 근간을 허물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차별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질 때쯤이면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는 교과서 속에서나 존재하는 죽은 지식이 되어 버리거나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진 위선적인 명분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더 많은 경쟁이 개개인의 경쟁력을 높여줄 수 있을지 사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일반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미 경쟁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나 개인, 우리회사,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그만큼 늘어났는지 자문해 보면 될 일이다. 다만 그 경쟁력이 무엇을 위한 경쟁력인지, 경쟁을 통해 우리가 얻고 또 잃는 것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자유경쟁이 갖는 혁신의 명분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금의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의 문제를 보면서 산업혁명기 러다이트들의 출현을 예감하는 것은 나만의 불온한 상상인가? [2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