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행복총량 보존의 ‘법칙’?

ladakh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발생한 자이나교(Jainism) 계열의 종교에는 누구나 한 생애 동안 쉬는 숨의 횟수는 일정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요가 수련에서 숨쉬기 운동이 강조되는 것도 호흡 조절을 통해 생명의 템포를 느리거나 빠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과학적인 관찰과는 거리가 있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무언가의 총량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에너지가 새로이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다만 전기, 빛, 소리 등의 형태로 드러나는 모습을 바꿀 수 있을 뿐이라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자연의 섭리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는데 중요한 직관을 제공했던 것처럼 무언가가 보존된다는 관점은 새로운 통찰의 기회를 줄 수 있다.

물질적 풍요와 번영의 시대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궁핍과 고난의 시절을 살았던 선대보다 과연 더 행복한가? 매해 발표되는 국가별 행복지수라는 것을 들어보아도 주관적인 행복의 정도는 자신이 속한 국가의 경제력과는 크게 상관관계가 없는 듯하다. 더 나아가 소위 ‘88만원 세대’가 겪는 고충과 무력감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개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총량은 시절을 막론하고 일정한 값으로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이르게 된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세대가 아직 동시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역정낼 일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얼마나 살아있음을 누렸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행복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정서상태가 말해주는 것이라면 ‘배고픔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연민이 관념의 사치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비행기, 고속철, 인터넷…, 우리가 새로이 갖게 된 것들은 모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이지만 그렇게 절약한 시간은 다 어디로 갔는가? 자급자족으로 유지되던 전통사회에는 아이폰도 없었고 엘리베이터도 없었지만 지금처럼 시간이 없어 허둥대지는 않았다.

세계는 점점 더 하나로 묶이고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어떤 규칙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듯하다. 남의 나라 돈의 가치가 출렁일 때마다 나의 노후가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외국국채의 금리변동 소식이 내게는 정리해고의 쓰나미로 몰아칠 수도 있다. 이런 부침은 비단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어선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든 아랍세계든 극동이든 남미든 도시는 점점 더 커지고 있거나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적어도 유행하는 음악이나 복식으로는 더 이상 지역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근대화가 늦어진 곳의 젊은이들은 조상들의 ‘전근대적인’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을 부끄러워하고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는 하나 둘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물론 이런 비용을 치름으로써 우리는 배고픔을 면했고 동시에 좀 더 크게 보면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확산되었다. 하지만 세 끼니와 민주주의는 곧 숨쉬는 공기와 같이 당연한 것이 되었고 이제 쌀밥을 하루에 세 번 먹고 산다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만사를 인간의 욕심 탓으로 돌리면 이야기가 단순해지겠지만 문제는 개발과 소위 세계화를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는데 있다.

지금 인구에 회자되는 세계화는 교류의 활성화를 통한 보편적 가치의 확산과 공유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외에 지역성을 파괴하고 위기의 파급에 더 불안정적인 체제로의 편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슬로우푸드(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운동) 등 직간접적으로 이런 세계화의 그물망에 구멍을 내는 일들도 서서히 저변을 넓혀가는 추세다.

개발, 발전, 진보라는 미명 하에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을 행복이라는 손익계산서에서 셈해 볼 때 ‘행복총량 보존’의 딜레마가 새로운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1-12]